패스트벤처스가 작년 하반기에 가장 중점적으로 학습하고 도전했던 일 중에 하나가, 바로 투자의 범위를 넓히는 일이었습니다. 보통 패스트벤처스라고 하면 소프트웨어, 서비스, 컨텐츠 등의 말랑말랑한 영역에 주로 투자를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을텐데요. 저희가 작년 하반기에 연달아 투자를 한 곳은 의료기기 ‘에이슨’, 신약개발 ‘넥스세라’, AI 기반 바이오헬스케어 소프트웨어 ‘액트노바’ - 였습니다.
VC 업계에서 보통 바이오 헬스케어는 상당한 진입장벽이 있다고 알려진 분야입니다. 그래서 소위 말해 의사출신, 생명공학 전공 출신 - 들이어야만, 도메인 분야의 전문성이 있어야만, 딜을 소싱도 하고 검토도 할 수 있다고 여겨지곤 하는데요. 그런 것 치고 저희는 의사출신도 아니고, 생명공학 출신도 아니지만, 이 분야를 살펴봐야 한다고 결정하고, 또 용감하게 실행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VC 투자를 통해 가장 큰 수익을 발생시키는 소위 ‘4대 분야’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소프트웨어/서비스 분야는 혁신이 일어나는 1/n 분야에 불과합니다. 매년 탄생하는 유니콘의 숫자, 새롭게 IPO 하는 스타트업들의 숫자 등을 분야별로 나눠보면, 소프트웨어/서비스 외에, 반도체/소부장, 게임/컨텐츠, 그리고 바이오/헬스케어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B2C 서비스가 아닐 뿐, 실제로 큰 기업가치와 대단한 혁신이 저 4개 분야에서 고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소프트웨어/서비스 분야만을 고집하는 것은 그 분야에 집중한다는 긍정적 의미도 있겠지만, 3/4에 달하는 시장을 놓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두번째 이유는, 진입장벽이 높습니다. 쿠팡, 토스, 배민 같은 투자는 ‘상대적으로’ 도메인 전문성이 없이도, 전국민이 쓰는 consumer 분야이기 때문에, VC 투자자로서는 진입장벽이 낮습니다. 반면, 바이오/헬스케어 분야는 이 분야 스타트업의 사업계획서들을 보다보면 외계어로 가득찬 느낌을 받을 정도로 낯선 이야기들 뿐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진입장벽만 넘을 수 있다면 경쟁이 상대적으로 덜 치열하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처음 바이오 용어들을 접하면 낯설지만, 바이오 스타트업의 deck을 100개 정도 보고 모르는 용어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공부하다보면, 100%는 아니더라도 맥락과 의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좀 무식하게, 진입장벽을 넘기 위해 양으로 승부를 했습니다.
세번째 이유는, 많은 투자자들이 바이오/헬스케어를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이오/헬스케어의 경우 꽤 오랫동안 매출이 잘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투자자들이 한국에만 좀 특화된 ‘기술특례상장’이라는 루트로 Exit을 합니다. 그런데 작년부터 이 ‘기술특례상장’ 루트가 상당히 까다로워졌고, 그러다보니 많은 투자자들이 기투자했던 바이오/헬스케어 포트폴리오에 문제들이 좀 발생하다보니, 이 분야 신규 투자를 상당수 멈췄습니다. 저희는 앞서 소개했던 ‘청개구리 투자법’에서처럼, 지금이야말로 우리 같은 도메인 문외한들이 이 바이오/헬스케어 투자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습니다. 원래 같았다면 저희들에게까지 검토 기회가 오지 않았을 딜들도, 워낙 해당 분야 투자 시장이 얼어붙다보니 저희에게까지 기회가 주어질 수 있을테니까요.
물론, 투자 시장에서는 상반된 관점들이 공존합니다. 누군가는 내가 잘 아는 분야에만 집중해도 충분하다고 얘기하고 또 그런 관점으로 큰 성과를 낸 사람도 있고, 또 누군가는 계속해서 투자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것은 충분히 의미있고 넓혀나가는 방법과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관점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자의 생각을 꽤 오랫동안 유지해왔지만, 저보다 나이가 많은 선배 벤처캐피탈리스트 분들이 지금의 저보다도 늦은 나이에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주말/야간 대학원 과정에 등록하고 새로운 도메인을 계속 학습하시는 모습을 보며 너무나 큰 반성을 했습니다. 사실, 바이오/헬스케어라는 것이 학문으로서 탐구를 하다보면 끝도 없겠지만, 제가 하려는 것은 그 분야의 리서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하려는 것이니까요. 투자를 하기 위해 요구되는 필요조건 정도의 지식을 갖추는 것은 조금만 시간을 내고, 조금만 끈기를 갖고, 조금만 노력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덕분에 매일 매일 나랑 상관없다 느껴졌던 세상의 많은 일들이 좀 더 재밌고 흥미롭게 다가왔고, 투자의 지평을 오랜만에 넓히고 있다는 생각에 많은 즐거움도 느껴졌습니다.
네, 패스트벤처스는 이제 바이오/헬스케어 분야에 대한 투자도 활발하게 진행하려고 합니다. 핵심은 분야 최고의 전문성이 아니라 (분야 최고의 전문성을 가진다면 투자가 아니라 연구나 사업을 직접 해야겠죠), 필요조건에 해당하는 지식을 갖추고, 나만의 관점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학습하고, 또 관점을 업그레이드 해나가겠습니다. 바이오/헬스케어 분야에서 창업을 하시는 많은 훌륭한 분들과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교류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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